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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글

[오픈갤러리, 2021.11.10] [아트경기X오픈갤러리] 이윤정: 붓 대신 끈을 이용해 동양화를 그려요

[아트경기X오픈갤러리] 이윤정: 붓 대신 끈을 이용해 동양화를 그려요

11월 다섯 번째로 소개할 아트경기 작가는 이윤정 작가입니다. 이윤정 작가는 붓 대신 끈을 이용해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는 실험적인 작업을 합니다. 작가는 여러 색상의 끈들을 조합하여 꽃, 바위, 산 등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작가는 레이스 끈에 안료를 적셔 한지에 찍어낸 뒤 칼로 그 부분만을 잘라 완성한 것으로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수묵채색화와는 다른 느낌을 자아냅니다. 작가에게 있어 끈은 붓 대신 작업을 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인간의 삶을 비유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718037&memberNo=856760

장생(長生) Long Life

장생(長生) Long Life

박소희(영은미술관 전시팀장)

영은 미술관은 아티스트 프로젝트 일환으로 진행되는 영은창작스튜디오 11기 이윤정의 ‘장생’ 展을 개최한다. 이윤정은 동양화를 전공하고 10여 년 전부터 끈에 주목해 작업한다. 작가는 모필을 사용한 전통적인 필선을 사용하지는 않는 대신 끈을 붓으로 활용한다. 끈은 점차 영역을 확장하고, 역할을 더해 작품의 한 부분이 되어(부조) 화면을 구성하는 한편 작품 자체가 되기도 한다. 끈은 이렇듯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되어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장치로써, 작품의 시작과 끝에 시종일관 존재한다. 한지위에 레이스 끈을 찍어 나타난 선, 혹은 선 주위를 잘라내고 남은 끈은 동양화 준법의 기능으로 원래의 목적을 수행하는 동시에 미적 공간에도 이바지한다.

이번 전시 제목인 장생을 가시화한 바위는 끊임없이 들이치는 파도와 바람에도 그저 그 자리를 지키는 십장생의 하나이자 장수의 상징이다. 이번 전시 대표 작품인 <바위 수집, 2019, 가변설치>에서 끈은 이러한 크고 작은 바위가 되어 전시장 한 편을 흔히 보는 풍경으로 연출한다. 바위는 언제 생겼는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주름만큼 누적된 시간을 보냈으며, 그 세월의 궤적이 다시 끈이 되어 전시장에 굴곡 진다. 모든 존재는 세월이 남긴 주름을 각자의 방식으로 갖는다. 바위도 사람도 다르지 않다. 레이스 끈 주름은 시간의 흔적으로 특별한 궤도가 되어 바위가 되고 공간에 주름진다. 이윤정의 끈 주름은 가치의 여부나 쓸모를 떠나 존재함에 대한 증표이자 생존에 대한 일종의 상(賞)인 셈이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먼 발치에서 끈이 만든 바위를 먼저 보고 가까이에서 바위가 된 연약한 레이스 끈을 보게 된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그동안 시도한 다양한 매체와 방법론을 함께 보는 기회이자, 다음 전시에서 시도될 또 다른 실험이 기다려지는 자리이다.

영은미술관 YEMCA

[이데일리, 2018.10.15] [e갤러리] 끈덩이의 세월, 세상의 주름…이윤정 ‘풍랑’

[e갤러리] 끈덩이의 세월, 세상의 주름…이윤정 ‘풍랑’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검푸른 끈이 뭉텅이로 던져졌다. 얼마나 얽혔을까. 얼마나 엉켰을까. 억겁일 거다. 아니라면 그 끈이 산처럼 솟고 바위처럼 뭉칠 리가 없다.
작가 이윤정은 끈을 그린다. 배배 꼬인 끈의 얽힘으로 인생의 굴곡이나 존재의 엇갈림을 풀어내던 것이 처음이다. 그러던 게 변해갔다. 산의 주름이 되고 바위의 구김이 됐다. 전통동양화에서 산수를 묘사할 때 쓴다는 ‘준’이란 선을 끌어낸 거다.
방식은 이렇다. 흰색 레이스끈에 먹물을 적셔, 구기고 꼬인 채로 한지에 찍어내고, 그 흔적을 좇아 색을 여러 차례 입혀 간다. 흔적이 겹쳐지면 덩어리가 되고 펼쳐지면 땅이 된다. 끈 위에 수없이 박아낸 흰 점으로는 마무리. 산세의 깊이를 더하고 바위의 양감을 돋아낸다.
‘풍랑’(2017)은 그렇게 완성한 덩이의 세월. 세상의 주름이고 구김이다.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갤러리그림손서 여는 개인전 ‘땅의 주름’에서 볼 수 있다. 한지에 수묵채색. 173×210㎝. 작가 소장. 갤러리그림손 제공.

https://m.edaily.co.kr/news/Read?newsId=01134886619373248

[이데일리, 2016.11.07] [e갤러리] 끈으로 그려낸 山水…이윤정 ‘산’

[e갤러리] 끈으로 그려낸 山水…이윤정 ‘산’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끈으로 엮은 억겁의 주름. 동양화가 이윤정은 끈으로 풍경화를 그린다. 작품에 끈을 사용한 건 2002년부터다. 당시 끈은 인생과 관계에 대한 비유를 의미했다. 풀기도 끊기도 어려운 거창한 줄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내려놨다”. 2013년 산악여행이 전환점이 됐단다. “히말라야의 단층이 드러난 험준한 산에서 그동안 그려오던 끈이 겹쳐 보였다”고 회고한다. 의미에 집착하기보다 끈을 그저 선으로 보고 산수를 묘사한 것이다. 작품의 모델이 된 끈은 흰색 레이스다. 갖가지 무늬의 구멍에서 비롯한 점이 추상적 원근감을 드러낸다. 하얀벽에 떨어뜨린 그림자 덕에 평면을 넘어선 3차원의 깊은 산세까지 살아 있다.

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길 갤러리도스에서 여는 개인전 ‘산과 섬’에서 볼 수 있다. 한지에 수묵채색. 74×53㎝. 작가 소장. 갤러리도스 제공.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718037&memberNo=856760

나풀거리는 자연의 층

나풀거리는 자연의 층

이선영(미술평론가)

끈의 접힘과 펼침으로 이루어진 이윤정의 풍경은 억겁의 세월동안 주름져온 공간을 표현한다. 풍경을 이루는 산과 섬은 동어 반복적이다. 작가 말대로 ‘바다 속의 산이 섬이고, 산은 풍경 안에서 섬을 이루기 때문’이다. 지형대로 오려진 작품의 경우, 배경이 삭제되기 때문에 섬인지 산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여러 작품에서 끈이라는 동일한 요소가 등장하기에 풍경은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끈은 한 작품 내에서도 연결망을 만들지만 작품들 간의 연결망도 만드는 것이다. 큰 전시 벽면을 차지하는 [모(模)인왕제색도]는 끈이라는 조형언어로 재해석된 풍경의 확장성을 알려준다. 두 덩어리로 오려진 이 작품은 그려진 것을 설치하는 가변적 방식을 통해 그림이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풍경/그림은 구축/해체된다. 만약 그것이 산이 아니라 섬이라면 전시 공간 곳곳으로 흩어트릴 수도 있다. 이때 전시장의 하얀 벽면은 망망한 바다, 또는 하늘이 될 것이다. 그것은 원래 동양화에서 여백이라고 칭해졌던 공간이다.

[모(模)인왕제색도]처럼 큰 작품이 아니더라도 끈 모양대로 오려진 형태는 나머지 공간을 여백으로 만들기 때문에, 풍경은 전체 전시장을 무대 삼아 이어질 수 있다. 떨어져 있을 때도 연결망은 작동되는 것이다. 청명한 날씨에 보았던 독도를 담은 작품들은 시점만 바뀐 모습이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산과 섬이라는 고정적이고 안정된 대상은 끈의 출렁임으로 들썩인다. 농악대의 모자에 달린 끈이나 리듬체조 선수의 띠가 그러하듯이, 거기에는 연이어 전달되는 힘에서 풀려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작품 [춤추는 산]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에너지는 얼큰한 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띠는 안정된 층을 교란하는 역동성을 가진다. 가령 뫼비우스 띠는 양끝의 앞면과 뒷면을 연결 지으면서 무한대의 차원을 열어 제친다. 현대 사상은 인간의 심리(라깡)나 육체(엘리자베스 그로츠)를 뫼비우스 띠로 간주하면서, 심신에 관한 기존의 표면/심층이라는 구조적 모델을 거부한다.

이윤정의 경우는 인간보다 좀 더 큰 자연인 섬과 산 같은 지형물도 줄기차게 어떤 핵심과 본질을 가정하는 심층 모델로부터 벗어나 있다. 자연은 분명 인공물보다는 깊이가 있지만, 그 깊이는 다층적 표면들에 의한 깊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질학적 시간을 가지는 산이나 섬처럼 오래된 시간의 느낌을 가진 대상은 연한 색부터 수 십 차례 계속 올린 결과이다. 색은 지형이나 단층 같은 방식으로 진해진다. 그러나 물감이 물리적 두께로 쌓이는 서양화와 달리, 한지에 수묵 채색 된 작품들은 층위가 있으면서 얇다는 특징을 가진다. 덩어리가 아니라면, 그것도 띠처럼 얇은 면의 운동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자연의 생기를 표현한다. 얼마 전 한반도에도 지진대의 활성화가 발견되었던 것처럼, 지구는 살아있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살아있는 지구는 단단한 지표면을 이루는 암석 대에서 발견된다. 산이나 섬을 이루는 암석 대는 인간의 삶에 비하면 너무나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 같지만, 인간의 피부가 매순간 다른 세포로 교체되듯이 그것들도 변화한다.

동일성 내부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은 영원한 듯 펼쳐진 풍경이 일순간의 고정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모든 것을 과정 속의 존재로 놓는 것은 한갓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를 독단화 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이다. 이윤정의 풍경 속에서 연속과 불연속은 교차한다. 연속과 연속 사이의 불연속적 시공간대, 즉 순차적으로 쌓여있는 지층이 단층이 되고 순서가 뒤바뀌고 하는 격변기 또한 기록된다. 이윤정이 선택한 조형 언어인 끈은 연속성 속에서 변화하는 순간에 대한 감각을 살려준다. 이러한 끈이 풍경에 적용되었을 때, 정중동의 미학은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아스라하게 멀어지는 관념적 풍경이 아니라, 관객의 눈앞에 확 당겨오며, 시각성을 넘어서 촉각성까지 고무하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먼 것과 가까운 것 사이를 압축시키는 현대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심오한’ 순수 미술이 언제까지고 ‘바깥의’ 화려한 스펙터클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스펙터클이 근현대미술의 혁명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 역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풍경이 먼저 보이든 끈이 먼저 보이든, 끈이라는 일상적 사물 자체가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건을 묶는 줄부터 메시지가 새겨진 다소간 넓은 띠인 플래카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끈은 우리의 일상에 깔려있다. 끈은 얽히고설킨 망을 이룬다. 일상세계를 넘어 전기나 전자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관계망 자체가 실재가 된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끈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2년이다. 당시에는 인생과 관계에 대한 비유였다. 그 끈들은 풀기도 끊기도 어려운 착종된 선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즘 작품에서 풍경에 적용된 끈은 좀 더 후련하다. 이윤정은 작가노트에서 ‘열심히 끈에 인생과 관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 풍경의 그림에서 끈은 그저 선이고 산수의 준법이었다.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끈으로 그린 풍경화의 시작이다’라고 밝힌다.

2013년의 산악 여행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엇을 새로이 발견 했다기 보다는 자기 안에 있던 것의 재발견이다. 작가는 ‘히말라야의 단층이 드러난 험준한 산에서 그동안 그려오던 끈들이 겹쳐 보였다’고회고한다. 작가는 2016년에 전시 때문에 방문한 독도에서도 그러한 단층을 발견했다. 어떤 물리 이론(string theory)은 우주를 끈의 진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재)발견은 끈이라는 의미에 집착하기보다는 끈을 그냥 선으로 보고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을 이끌었다. 동양화는 대개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이물감은 없었다. 시간의 쌓임이 있는 산수를 끈의 얽힘으로 표현한 이 전시는 전통산수화와 민화에 나오는 산을 얽힌 끈을 이용하여 재현한 작품과 산의 골격을 표현한 골격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오려버린 수묵채색화로 이루어져 있다.작가는 산 또는 섬의 능선을 끈으로 따서 대상을 묘사한 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선만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오려진 한 뭉텅이의 선들은 그러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벽면에 그대로, 또는 유리면에, 또는 나무판을 덧대고 설치되어 있다. 지나가면서 본 겨울 산의 능선이나 민화 속 산을 춤추듯이 그린 작품에는 율동감이 있다. 이렇게 끈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인생이라는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야기했지만, 좀 더 분석적이 된 화면은 조형적 의미로의 변화를 예시한다. 이윤정의 작품의 모델이 된 끈은 흰색 레이스이며, 몇 가지 넓이의 끈이 꼬이고 겹쳐지는 방식에 따라 얇은 원근감이 있다. 레이스의 갖가지 무늬의 구멍에서 비롯된 점들은 추상적 원근감을 드러낸다. 조형언어에 의한 원근감은 오려낸 도상을 벽면에 약간 띄워서 설치함으로서 야기된 그림자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산세를 표현한 띠를 오려서 벽이나 유리면에 붙여 생겨난 그림자 역시 선으로 나타난다. 이윤정 전은 ‘산과 섬’이라는 전시부제가 아니었다면, 어떤 작품은 그냥 추상화로 봐도 될 만큼 조형언어가 도드라진다. 조형 언어는 단순히 어떤 내용을 실어 나르는 도구이기 보다는, 늘 보던 같은 대상을 전혀 새롭게 보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 차이를 통해서 재현이라는 맥 빠진 반복을 탈피할 수 있다. 띠는 지시대상과의 결박을 풀어헤치고 차이의 유희를 가능케 한다. [모(模)인왕제색도]에 나타나듯이, 이러한 차이를 통해 대가들의 어법에 또 하나의 어법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힘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지시대상 및 참조물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참조물에는 정선을 비롯한 동양화의 대가들의 방식 또한 포함된다. 그러나 조형언어의 자율성은 작품을 형식화, 장식화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선을 이루는 모든 맥락을 제거한 작품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실재감은 작가가 조형언어를 여전히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양자 간의 균형이다. 안이 밖으로 되고 밖이 안으로 되며, 접혀있다가도 펼쳐질 수 있는 띠는 유연하게 양극을 넘나들 수 있도록 한다. 지시대상과의 관련성을 가지면서도 조형언어의 자기 지시성과의 균형을 찾는 과제는 19세기말 초창기 모더니즘의 특징이었다.

특히 웅장한 산의 실재감과 띠의 힘찬 운동을 근접시킨 작품에서는 근대미술의 어법을 확립한 세잔이 수없이 그렸던 어떤 산을 떠오르게 한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기존 서양회화의 원근법을 거부한 세잔의 방식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세잔은 그림을 얕은 상자처럼 다뤄서 화면 뒤로 공간을 몇 겹으로 표현했다. 세잔의 풍경은 소실점이 없는 대신 공간이 평행하게 몇 겹의 층을 이루며 색채와 색조로 구별된다. 형태는 크기가 줄어드는 대신, 전체 그림을 통해 반복된다. 몇 가지 두께를 가지는 이윤정의 띠의 겹침은 입체감을 주기 위한 원근법이나 모델링의 관행을 벗어나면서도 실재감을 표현한다. 세잔은 물론 마네와 모네 등, 근대미술의 서막을 알린 대표적 화가들은 그림에서 공간적인 깊이감을 피하고 평평하게 보이게 했다. 그들은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평평한 표면이라고 생각했으며, 후에는 일정한 질서에 의해 배열된 색들로 덮인 표면이라고 정의되었다.

앨런 보네스는 이러한 접근방식은 모던 아트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여러 겹 올렸지만 물리적으로는 두텁거나 넓지 않은 색 면의 접힘과 펼침은 대상과 그림 모두의 실재성을 확보하려한 근대미술가들의 어법을 공유한다. 세잔이 수없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에서 산이라는 대상과 색깔 있는 붓자국은 공존한다. 인상주의에서는 대상은 사라지고 흐릿한(그러나 충만한) 붓자국만 남았지만, 이는 세잔이 비판했듯이 그림에 있어서 구축의 문제를 간과한 것이다. 대상과 언어를 공존시키고자 하는 양자의 관계에 대한 세잔의 해법은 메를로퐁티를 비롯한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세잔 언어의 특징을 색채에 의한 형 뜨기라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색과 형은 상보적이다. 대상에 대한 환영이면서도 잡혀질 듯 구체적인 화면을 완성한 세잔은 자연과 예술 두 가지를 통일시키고자 했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선이라는 조형언어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띠는 명암 등 자체 내의 실재감을 가지면서도 대상을 표현한다.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져 조합의 가능성을 열어둔 이 전시의 작품들이 벌이고 있는 대상과 언어 간의 불안한 줄다리기는 근대 미술의 중심 화두였다. 대상과의 관련을 가지는 띠의 흐름은 물리적으로 오려내 지면서 사각형 공간을 벗어났고, 그럼으로서 이러한 줄다리기는 다른 차원으로 확대된다. 전시장 벽면에 드리워지는 또 하나의 선, 즉 그림자는 실물의 일부로 의식된다. 그것은 환영의 환영이면서 환영과 상호작용한다. 그림자 또한 창문이나 거울이라는 비유만큼이나 회화의 기원을 설명해 왔다. 그림자의 비유는 회화의 촉각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빛이 사라지면 질감만 남기 때문이다. 이윤정이 선택한 띠라는 특화된 조형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거기에는 레이스의 질감이 살아있으며, 때로 색감도 남아있다. 작품 속 금색 레이스는 금속성을 띤다.

벽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작품들은 3차원 대상을 2차원으로 드러내는 회화를 벗어나 3차원에 속한다. 줄리언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회화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는 고전적 정의를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평면에서 입체처럼 보이는 것을 본다. 회화는 평평한 대상이다. 하얀 벽에 떨어진 이윤정의 작품/그림자는 3차원으로 확장되긴 했지만, 띠에 남아있던 원근감마저 지워버림으로서 회화가 결국 표면적인 것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그것은 ‘표면에 채색된 표시를 만들어내는 회화 작업의 관행’(줄리언 벨)의 연속이다. 그러나 단순히 회화가 회화임을 확인하는 형식주의는 아니다. 아스라이 명멸하는 선이 아닌 띠는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시각예술의 특징인 생생한 구체성을 담보한다. 이러한 구체성은 단순한 물성을 넘어서 매혹적인 자연의 일부로 나타난다.

관계를 보여주는 선 풍경

관계를 보여주는 선 풍경

박영택 (경기대 교수)

무수한 끈들이 겹쳐있거나 꼬여있다. 모노타입으로 찍힌 끈과 그려진 끈들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중심에서부터 시작해 밖을 향해 선회하고 나아가는 형국을 보여준다. 작가는 끈이란 소재를 통해 무엇인가 복잡하게 얽히고 가늠하기 어려운 난맥상을 연출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 삶에서 연유하는 불가피한 관계로 인한 것이자 머릿 속이나 내면의 풍경을 은유하는 듯 보인다. 흔히 실타래에 비유하는 마음의 산란한 상황성 내지 꼬인 사람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이미지다.

명료하고 단일한 그 무엇으로 지칭하거나 정리할 수 없는 상념과 단상, 정신과 마음들이 어지러이 부유한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관계들이 남긴 자취와 상처, 기억들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다닌다. 그것은 매순간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또는 다양한 모습으로 출몰한다. 작가는 그렇게 삶에서 비롯된 여러 기억과 상처들을 이미지화했다. 상당히 직접적인 메시지가 읽혀지는 이러한 표현방식은 선들만으로 이루어진 조형공간을 통해 발화된다. 화면에 유기적인 선들이 교차하면서 환영적인 공간감을 야기한다. 평면성과 눈속임이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화면은 2차원과 3차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듯 하다. 생각해보면 그 선은 동시에 면들이고 일정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화면이기도 하다. 중심도 주변도 가늠하기 어려우며 투명과 불투명, 먹과 채색, 이미지와 실제 물질이 공존하는 그런 화면이다. 화면 역시 무수한, 기이한 관계들의 혼합물이다.

개별적 사연을 지닌 기억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특정 존재에 대한 정보를 간직한 다양한 모양과 색채, 질감을 지닌 여러 선들이 밑에 자리한 선들을 덮고 지우고 다시 덧씌운다. 그러나 밑에 가려진 여러 선들은 온전히 망각되지 않고 계속 잔존해서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의식세계 혹은 무의식의 지층에 깔려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나임과 동시에 무수한 타자들의 관계 속에서 직조된 존재다. ‘나’는 없다. 있다면 무수한 타자로 구성된 ‘나’일 뿐이다. 나는 나임과 동시에 사실은 수많은 타자들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국가와 사회, 가정과 직장 그리고 특정한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규정된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누구나 그 틀과 제도,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기도 하다. 관계에 얽혀있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모순적인, 양가적인 감정이 삶을 지배한다. 생각해보면 동양의 전통적인 산수화는 그런 모순적인 감정상태를 재현해왔다. 산 속에 은거하는 선비는 다리를 건너왔다. 그는 모든 관계로 촘촘한 속세, 현실계를 단호하게 피해 은닉하지만 시상이 불러주기를 고대하며 책을 읽거나 다리를 건너오는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러나 격수를 두고 하단에 빈 집만이 위치해있거나 인적을 죄다 지운 그림들은 이제 그 현실계에 대한 미련이나 인간관계로 얽힌 세속을 단호히, 아쌀하게 지워버린다는 제스처로 흥건한 그림이다. 유교적이고 도가적인 세계관이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한 그런 그림들이 우리가 보고 있는 전통 (인물) 산수화들이다.

작가가 연출하는 끈의 풍경은 그리기와 찍기 (판화), 오브제의 쌓아올림, 아크릴박스와 연결된 설치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중심적인 것은 한지라는 재료, 물질이다. 작가에게 한지는 그림이 그려지는 바탕 면이자 동시에 그 한지 자체가 오브제화 되어 화면 위에 콜라쥬 되고 일정한 단위의 한지 자체가 개별적인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이것들이 모이고 쌓여가면서 또 다른 화면을 풍성하게 보여주는 편이다. 아울러 꽃문양을 지닌 레이스 에 물감을 묻혀 찍어내고 이를 다시 가필, 보정해서 판화와 그리기가 혼재한 상태로 응고시키고 그 위에 다시 끈을 그림 그림이 얹혀있기도 하다. 인쇄된 것과 그려진 것들 간의 충돌과 혼재, 레디메이드의 차용과 손의 흔적이 상호보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그런 그림이다. 그 둘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풍경 역시 불가피한 소산이다, 모든 것은 알 수 없는, 계획되지 않는 어떤 관계들로 인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결코 예단하거나 추정하기 어렵다. 인간의 삶은 다만 그 관계가 남긴 흔적을 따라간다. 필연과 우연이 아찔하게 교차한다.

 

이윤정의 그림은 어떤 끈/ 길들을 보여준다. 그 길은 , 끈은 시간이자 여정이고 개별 삶의 초상이고 기억이자 상흔 같은 것들이다. 평면의 선, 끈은 병렬로 배열되거나 무작위로 중첩되거나 원형으로, 꽈배기 형상으로 전개된다. 직선적인 종이의 모양은 일정한 길이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구부러지고 굴절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생김새다. 납작한 화면에 일루젼을 주면서 그 종이들은 마구 굴곡진 상황을 가시화한다.

김재순의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 중 <오늘만은>의 한 구절처럼 이윤정은 ‘몸에 맞던 옷을 찾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 ‘옷에 몸에 맞춘다.’ 과거에 하나의 외로운 <섬>이었고 심난한 <또 하나의 얼굴>이었던 이윤정의 <자화상>과 <일기>는 현재 이렇게 <꿈>이 되었다. <악몽>이 아닌 <꿈>이 되었다.

 

또한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끼워지고 부착된 선들은 일정한 틀, 규범과 제도 안에 갇히고 제한된 상태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주어진 형식, 관계의 틀에 몸을 맞춰 사는 사람들 말이다. 선들은 허공에 드로잉을 하듯, 마치 수족관에 갇힌 장어떼들처럼 어지러이 부유한다. 순간 그 선들이 자족적으로 허공에 떠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일정한 형식, 관계망 안에 사로잡힌 개별 전재들이 문득 그로부터 풀려나와, 그 관계를 무시해버리고 홀로 나앉아 있다는 상상을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아크릴박스 안에 담긴 선, 표면에 부착된 선들이 그것 자체로 살아나는 생명체처럼 자립한다. 선/ 면이 제한된 화면에 종속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선 하나하나가 그대로 개별성과 단독성을 지니면서 항거하듯 일어선다. 현실을 사는 우리들 모두는 특정 관계의 틀 안에 들어가서 사는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은 그 틀 안에 안주하고 안락하게 보내며 틀 밖을 상상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벽에 붙어 틀 안과 틀 밖의 경계에서 쓰라리게 버티고자 한다. 이른바 ‘에지’에 선 자들이다. 이윤정의 그림은 어지러운 선들의 교차와 난맥상을 소박하게 보여준다는 인상인데 그 안에서 필자는 ‘ 에지에 선 자’ 들의 어떤 작은 외침 같은 것을 듣는다. 그 외침이 이 작업이 은연중 드리우고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다.

춤추는 별을 꿈꾸다

춤추는 별을 꿈꾸다

공주형 (학고재 디렉터)

꿈을 꾸었다. <악몽>이었다. 존재가 명확치 않은 내용물이 냄비에 가득했다. 돌돌 말린 종이 띠 모양의 내용물은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악몽에 대해 이야기 했다. 혹자는 시작과 끝이, 원인과 결과가, 안과 밖이 맞물려 시원스레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뫼비우스 띠 같다고 했고, 혹자는 이것이 유전(遺傳)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발병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다는 점에서 ‘뫼비우스 증후군’과 흡사하다고 했다. <미궁>이었다. 문제는 출구보다 의지였다. 어떻게 미궁에 빠졌는지 골몰하다 꼭 나가야 한다는 의지를 굳건히 할 수 없었다. 악몽에서 미궁으로, 미궁에서 다시 악몽으로, 힘든 동선이었다.

<함께하는 시간>, 이윤정 <삶>의 동선은 그러했다. 볕 좋은 창가에서 고양이가 이리저리 능청스레 굴리다 망쳐버린 실타래들 같았다. 13억 중국인이 사용 중인 4,000여 개 성씨 가운데 중요한 것의 계보를 뿌리와 가지, 잎으로 배치해 계보를 정리했다는 ‘만성대수(萬姓大樹)’란 이름의 수형도(樹型圖)와 같았다. <함께 하는 시간>이 왜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되어 발목을 잡는지, 그것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함께하는 <삶>이 왜 복잡한 수형도가 되어 머리를 아프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가면>를 쓰기로 했다. ‘어느 날 뱀이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를 찾아왔다. 뱀이 아픔을 호소하자 건강의 여신은 물약을 처방했다. 마시면 다 잊어버리는 물약이었다.’ 가면은 이윤정이 스스로에게 내린 일종의 물약과도 같은 처방이었다. 하양, 초록, 노랑, 빨강. 여러 색으로 손수 <가면>을 만들었다. 자가진단 후의 처방이었으므로 조제도 그의 몫이었다. 얼굴을 가렸다. 동그란 얼굴에 네모난 <가면>은 불편했지만 유익했다. 가면 안에서 시간을 허락받았다. 생각할 시간이었다. <악몽>을 떠올렸고, <미궁>을 생각했다. <함께하는 시간>을 떠올렸고, <삶>을 생각했다. 그랬다. <함께하는 시간>이 만든 <삶>이 부가한 역할에서 비롯된 <악몽>이고, <미궁>이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엄마’는, ‘아내’는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사이다. 짐짓 모른 체했던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용기를 내어본다. 의욕도 부려본다. 그리고 <옷에 몸을 맞춘다>. 정방형 옷에 몸을 맞춘다. 맵시도 나지 않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옷에 몸을 맞추고, 세상에 나를 맞추며 더 많은 여유, 더 너른 시야를 확보한다. 그래서 <악몽>과 <미궁>에 마구잡이로 덤비지 않는다.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 띠를 180도 꼬아 양끝을 연결하면 고리 모양의 뫼비우스 띠가 된다. 뫼비우스 띠의 시작과 끝의 신비를 한 순간에 캐내려고 무조건 가위질을 해대면 폭이 작은 또 하나의 뫼비우스 띠가 생긴다. 이 사실은 <가면> 속 시간에서 배운 것이다.

 

오늘만은 제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복해하겠습니다. 다음 세상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오늘만은 주변 상황이 나와 욕망에 맞도록 요구하지 않고 나 자신을 주변 상황에 맞추겠습니다.

 

김재순의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 중 <오늘만은>의 한 구절처럼 이윤정은 ‘몸에 맞던 옷을 찾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 ‘옷에 몸에 맞춘다.’ 과거에 하나의 외로운 <섬>이었고 심난한 <또 하나의 얼굴>이었던 이윤정의 <자화상>과 <일기>는 현재 이렇게 <꿈>이 되었다. <악몽>이 아닌 <꿈>이 되었다.

세상과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혼란, 그 속에서만 춤추는 별이 탄생한다고 했다. 오늘 이윤정은 춤추는 별을 순산했고, 그 별이 바로 <꿈>이다.

지편(地片)들의 유희 그리고 알레고리

지편(地片)들의 유희 그리고 알레고리

이재언 (미술평론가)

한국화가 이윤정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작가의 작업을 처음 대하면서 갖는 경험은 그림의 구조만큼이나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어 보이는 띠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 그리 단순치 않은 느낌들을 갖게 한다. 복잡한 듯 하지만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또한 무엇을 감고 있는 듯 하다가도 오히려 어떤 결박에서 풀려 나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갈등적인 듯도 하지만 화해적인 듯 하고, 불안하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지만 그러면서도 낙관적인 광채가 화면 도처에 감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띠들이 수없이 얽힌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생경하고 모순적인 문맥과 플롯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작가의 치밀한 의도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적인 결과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작가가 10년 넘게 작업의 과정을 통해 일관되게 동일한 모티브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연적인 것만은 결코 아님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는 한지의 띠들을 안료에 적셔서 다시 종이에 찍어내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시킴으로써 화면을 쌓아간다. 무수히 많은 모노타입의 판화들이 한 화면에 축적되는 것이다. 물에 대한 예민한 물리적 특성들이 찍히는 과정을 통해 예상치 못한 다양한 효과들을 보여주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다양한 방법들이 화면의 참신함을 줌과 동시에 우리 무의식 저 아래에 잠자고 있던 감성들을 다시 소환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마치 피륙의 위사와 경사처럼, 어떤 경우는 무질서한 분자들의 유희처럼 그 지편들은 우연과 분방한 자유의 몸짓과 궤적들로 장식된다. 하나하나의 지편(紙片)들이 저마다 변화무쌍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나, 색감조차도 엄선된 주조색을 적절히 변화시켜가는 내용들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율하게 된다. 이러한 찍기 방법은 오랜 모필에 익숙해 있던 작가와 또 수용자 모두에게 의외의 해방감과 참신한 감각을 줄 만한 것이다

심미적인 편안한 색조의 율동을 띤 이 지편들의 구성은 작가에게 상당히 중요한 근간이다. 거의 작가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만큼 밀도와 성취도 높은 내용을 이루고 있다. 물론 작가가 그동안 알 이미지나 띠 이미지들을 부가하는 등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변화시켜나가는,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야 할 국지적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긴 호흡과 선 굵은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자기다운 방법의 체계를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랜 방법의 천착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중간색 톤은 역시 가장 작가다운 감성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표출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유미적인 형식과 방법의 안정적인 기조에 작가는 의외의 요소들을 부가한다. 바로 그려지거나 데코파쥬처럼 오려진 띠가 결합되는 것이다. 작가가 이전에 알 이미지를 삽입했던 것처럼 찍어낸 지편의 이미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띠 이미지가 마치 결박하듯 조여오는 것이다. 이로써 평온했던 화면들은 배경의 효과로 밀리게 되고, 화면은 긴장과 갈등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야말로 극적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국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들은 온기를 지닌 생체에 차디찬 쇠사슬을 감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 띠 이미지는 쇠사슬과 같은 무거운 이미지가 아니다. 라오콘 군상에서 칭칭 감고 있는 뱀 이미지처럼 목표물에 집착하는 정황도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셀로판 같은 탄성을 지닌 것처럼 오히려 결박의 순간 반작용의 힘, 즉 풀려 나오는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국면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조이는 것이든 혹은 풀리는 것이든, 왜 작가는 이러한 뜻밖의 부가적 요소에 의해 긴장과 반전의 화두를 던지고 있는가. 종전의 알 이미지를 결합시켰을 때와는 문맥 자체가 대단히 다르다. 작가의 노트를 엿보자면 작가는 이러한 정황을 ‘인연’, ‘자화상’ 등의 명제로 암시해 나가고 있다. 즉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자 고백의 한 단면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무언가 복잡한 얽힘의 것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작가 내면의 상황들을 다 헤아릴 수야 없겠지만, 작가 스스로 자신을 성찰할 때 모순적인 자아의 모습이 충분히 공감이 간다.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으로 한정하였지만 독해하는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경험도 가능하다.

작가의 화면은 누가 보아도 복잡한 구조를 통해 그것이 시사하는 문맥을 연상해 나갈 수 있다. 이렇듯 복잡한 선들의 얽힘을 통해 작가 내면의 여러 가지 심리상황을 서술하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다. 열어 보일 수 없는 내면의 것에 대해 ‘띠’라는 가시적인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의 독해는 한정된 코드로만 안내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의적으로 혹은 동일한 대상을 통해 상반된 해석까지 가능한 열린 해석의 여지가 발견되고 있다. 작가가 편안하고 정감이 넘치는 화면을 긴장으로 몰아넣은 것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서술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뇌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지 않을까. 일상과는 또 다른 세계이자 자아의 또 다른 분신인 예술의 실재는 언제나 자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돈오(頓悟)처럼 다가온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띠라는 이미지는 알레고리로 읽히기보다는 단순한 설명이나 묘사로 읽히기가 쉬울 것이다.

부분적으로 다소의 과한 작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진지한 몰입과 겸허한 자기반성의 문맥들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추상적인 표현의 방법적 취약성을 보이고 있는 동양화 화단의 현실을 감안하면 작가의 조형적 실험들은 적지 않은 성취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방법과 공동체의 통시적이고 원형적인 미감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 동양화 화단에서 현대성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작가들의 일관성 있고 호흡이 긴 탐구와 예민한 조율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묵묵한 수행(修行)과도 같은 회화적 정진에서 바람직한 성취들이 기대된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완성은 아닐지라도 작가의 선이 굵은 조형적 수행들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며, 또한 기대를 갖게 한다.

卵-생성과 일탈

卵-생성과 일탈

김유숙(미술이론)

이윤정은 1992년 개인전에서 한지에 먹물이나 채색물감을 묻혀서 찍는 기법과 필선(筆線)으로 그리고 선염(渲染)하는 기법 등으로 자연물을 비롯하여 생활 속의 짐보따리, 놀이기구 등 여러 소재를 표현하였다. 이후 1996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소재가 자연물로 국한되면서 기법에 있어서는 기존의 찍기와 선염을 통해 화면을 추상화시켜 나갔다. 이에 있어서 점차 여백(餘白)이나 대상을 암시하는 선묘(線描)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특징적이었으며 이로써 자신만의 조형적인 틀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형적 특성을 기초로 하여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시도되었다. 필선에 의한 묘사 대신 파스텔, 색연필을 이용한 소묘가 눈에 띄며 수묵의 효과도 극히 제한적이고, 초묵(蕉墨)을 평면적으로 칠해나감으로써 묵(墨)이 검은색(black)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찍는 기법을 줄곧 사용하나 찍혀진 흔적을 정방형으로 구획하는 등 다양한 시각 효과를 꾀했다.
그럼으로써 숲과 같은 자연물을 상징했던 흔적들이 그저 조형적 장식, 즉 하나의 패턴(pattern)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알(卵)’이라는 소재를 새로이 설정하였는데, 그 모양새가 달걀의 형태이나 부서진 형태로 표현된 경우, 명암이 드러나게 소묘함으로써 마치 생명력을 잃은 화석처럼 느껴지고, 공간에서 떠도는 알의 형태들은 우주의 행성과도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온전한 달걀 형태의 ‘알’을 접하면서 우리가 처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마도 알이라는 소재가 지닌 ‘생명, 생성’ 이라는 상징성일 것이다. 하나, 이것이 그 안에 생명을 품은 생성의 의미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작가의 언급에서 알 수 있다.

<꿈을 꾸었다. 높은 둥지 위의 커다란 새. 둥지 안에는 여러 개의 알이 있었다. 그 큰 새는 부리로 자기가 낳은 알을 쪼아 깨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알에서 깨어날 새끼가 어미새의 자유를 구속하게 될 것을 아는 것처럼>–작업노트 중에서-

작가가 꾼 꿈의 어미 새처럼 이윤정 역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알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알로부터, 즉 자신에게 가해진 가정생활의 고달픔과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 즉 일탈을 꿈꾸는 것은 비단 이 작가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창작과 가정 사이, 또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된 노력을 지속하는 모든 여성들의 고충일 것이다. 결국 이윤정의 알의 의미는 굳이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용어를 빌지 않아도,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치열한 심리적 갈등의 표출로써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배경 처리된 흔적들은 무수한 끈이 얽힌 것으로, 그래서 여러 인연이 얽힌 복잡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알-그 이중적 의미>에서 이러한 복잡하게 얽힌 흔적들 위로 떠도는 알들은 의무감과 자유로의 일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알- 생성>은 아크릴 상자 속에 알이 그려져 있는 연작인데, 부화(孵化)하려는 알, 혹은 투명하게 자신의 알이 들여다보이나 그것을 결코 쉽게 깰 수 없는 현실 상황을 설정한 듯하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조형적 측면에서는 찍기와 선염이라는 조형적 틀이 정점에 다다른 듯하다. 대학원 졸업 이후 근 10년간 지속되어온 조형상 완결의 추구가 전통적 수묵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적 기초에서 삶의 절실한 문제를 진솔하게 꺼내어 보임으로써 이전의 작업에서 느껴지던 정신적 공허함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형적 완결, 즉 그가 생각하는 현대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였으나 이의 표현 방식은 전통적 미의식, 즉 전통회화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생동감이나 활달함 등의 감수성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오늘날 전통성과 현대성의 문제는 모든 작가들에게 부과된 공통의 짐이다. 어느 쪽을 기준으로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는 작가 개인의 개성과 의도에 달려있다. 이윤정의 경우, 지금까지는 현대성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작업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중에 전통 재료를 줄곧 놓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아마도 앞으로는 흔적을 통한 간접적인 표현기법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필선의 기운(氣韻)이나 수묵의 즉흥성 등을 다시금 도입할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