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개인전 모인화랑2020-03-16T15:14:12+09:00

Project Description

1999년 제 3회 개인전

1999.5.12~5.18
모인화랑

卵-생성과 일탈

김유숙(미술이론)

이윤정은 1992년 개인전에서 한지에 먹물이나 채색물감을 묻혀서 찍는 기법과 필선(筆線)으로 그리고 선염(渲染)하는 기법 등으로 자연물을 비롯하여 생활 속의 짐보따리, 놀이기구 등 여러 소재를 표현하였다. 이후 1996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소재가 자연물로 국한되면서 기법에 있어서는 기존의 찍기와 선염을 통해 화면을 추상화시켜 나갔다. 이에 있어서 점차 여백(餘白)이나 대상을 암시하는 선묘(線描)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특징적이었으며 이로써 자신만의 조형적인 틀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형적 특성을 기초로 하여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시도되었다. 필선에 의한 묘사 대신 파스텔, 색연필을 이용한 소묘가 눈에 띄며 수묵의 효과도 극히 제한적이고, 초묵(蕉墨)을 평면적으로 칠해나감으로써 묵(墨)이 검은색(black)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찍는 기법을 줄곧 사용하나 찍혀진 흔적을 정방형으로 구획하는 등 다양한 시각 효과를 꾀했다.
그럼으로써 숲과 같은 자연물을 상징했던 흔적들이 그저 조형적 장식, 즉 하나의 패턴(pattern)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알(卵)’이라는 소재를 새로이 설정하였는데, 그 모양새가 달걀의 형태이나 부서진 형태로 표현된 경우, 명암이 드러나게 소묘함으로써 마치 생명력을 잃은 화석처럼 느껴지고, 공간에서 떠도는 알의 형태들은 우주의 행성과도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온전한 달걀 형태의 ‘알’을 접하면서 우리가 처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마도 알이라는 소재가 지닌 ‘생명, 생성’ 이라는 상징성일 것이다. 하나, 이것이 그 안에 생명을 품은 생성의 의미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작가의 언급에서 알 수 있다.

<꿈을 꾸었다. 높은 둥지 위의 커다란 새. 둥지 안에는 여러 개의 알이 있었다. 그 큰 새는 부리로 자기가 낳은 알을 쪼아 깨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알에서 깨어날 새끼가 어미새의 자유를 구속하게 될 것을 아는 것처럼>–작업노트 중에서-

작가가 꾼 꿈의 어미 새처럼 이윤정 역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알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알로부터, 즉 자신에게 가해진 가정생활의 고달픔과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 즉 일탈을 꿈꾸는 것은 비단 이 작가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창작과 가정 사이, 또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된 노력을 지속하는 모든 여성들의 고충일 것이다. 결국 이윤정의 알의 의미는 굳이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용어를 빌지 않아도,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치열한 심리적 갈등의 표출로써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배경 처리된 흔적들은 무수한 끈이 얽힌 것으로, 그래서 여러 인연이 얽힌 복잡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알-그 이중적 의미>에서 이러한 복잡하게 얽힌 흔적들 위로 떠도는 알들은 의무감과 자유로의 일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알- 생성>은 아크릴 상자 속에 알이 그려져 있는 연작인데, 부화(孵化)하려는 알, 혹은 투명하게 자신의 알이 들여다보이나 그것을 결코 쉽게 깰 수 없는 현실 상황을 설정한 듯하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조형적 측면에서는 찍기와 선염이라는 조형적 틀이 정점에 다다른 듯하다. 대학원 졸업 이후 근 10년간 지속되어온 조형상 완결의 추구가 전통적 수묵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적 기초에서 삶의 절실한 문제를 진솔하게 꺼내어 보임으로써 이전의 작업에서 느껴지던 정신적 공허함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조형적 완결, 즉 그가 생각하는 현대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였으나 이의 표현 방식은 전통적 미의식, 즉 전통회화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생동감이나 활달함 등의 감수성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오늘날 전통성과 현대성의 문제는 모든 작가들에게 부과된 공통의 짐이다. 어느 쪽을 기준으로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는 작가 개인의 개성과 의도에 달려있다. 이윤정의 경우, 지금까지는 현대성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작업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중에 전통 재료를 줄곧 놓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아마도 앞으로는 흔적을 통한 간접적인 표현기법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필선의 기운(氣韻)이나 수묵의 즉흥성 등을 다시금 도입할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노트

꿈을 꾸었다.
높은 둥지 위의 커다란 새.
둥지 안에는 여러 개의 알이 있었다.
그 큰 새는 부리로 자기가 낳는 알을 쪼아 깨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알에서 깨어날 새끼가 어미 새의 자유를 구속하게 될 것을 아는 것처럼.
그 새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생활의 고달픔과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알고 싶은 나의 마음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깨어지지 않은 몇 개의 알들을 추려서 그 커다란 새의 품에 넣어 주고는 돌아 내려왔다.

 

(1999년 개인전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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