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풀거리는 자연의 층

이선영(미술평론가)

끈의 접힘과 펼침으로 이루어진 이윤정의 풍경은 억겁의 세월동안 주름져온 공간을 표현한다. 풍경을 이루는 산과 섬은 동어 반복적이다. 작가 말대로 ‘바다 속의 산이 섬이고, 산은 풍경 안에서 섬을 이루기 때문’이다. 지형대로 오려진 작품의 경우, 배경이 삭제되기 때문에 섬인지 산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여러 작품에서 끈이라는 동일한 요소가 등장하기에 풍경은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끈은 한 작품 내에서도 연결망을 만들지만 작품들 간의 연결망도 만드는 것이다. 큰 전시 벽면을 차지하는 [모(模)인왕제색도]는 끈이라는 조형언어로 재해석된 풍경의 확장성을 알려준다. 두 덩어리로 오려진 이 작품은 그려진 것을 설치하는 가변적 방식을 통해 그림이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풍경/그림은 구축/해체된다. 만약 그것이 산이 아니라 섬이라면 전시 공간 곳곳으로 흩어트릴 수도 있다. 이때 전시장의 하얀 벽면은 망망한 바다, 또는 하늘이 될 것이다. 그것은 원래 동양화에서 여백이라고 칭해졌던 공간이다.

[모(模)인왕제색도]처럼 큰 작품이 아니더라도 끈 모양대로 오려진 형태는 나머지 공간을 여백으로 만들기 때문에, 풍경은 전체 전시장을 무대 삼아 이어질 수 있다. 떨어져 있을 때도 연결망은 작동되는 것이다. 청명한 날씨에 보았던 독도를 담은 작품들은 시점만 바뀐 모습이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산과 섬이라는 고정적이고 안정된 대상은 끈의 출렁임으로 들썩인다. 농악대의 모자에 달린 끈이나 리듬체조 선수의 띠가 그러하듯이, 거기에는 연이어 전달되는 힘에서 풀려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작품 [춤추는 산]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에너지는 얼큰한 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띠는 안정된 층을 교란하는 역동성을 가진다. 가령 뫼비우스 띠는 양끝의 앞면과 뒷면을 연결 지으면서 무한대의 차원을 열어 제친다. 현대 사상은 인간의 심리(라깡)나 육체(엘리자베스 그로츠)를 뫼비우스 띠로 간주하면서, 심신에 관한 기존의 표면/심층이라는 구조적 모델을 거부한다.

이윤정의 경우는 인간보다 좀 더 큰 자연인 섬과 산 같은 지형물도 줄기차게 어떤 핵심과 본질을 가정하는 심층 모델로부터 벗어나 있다. 자연은 분명 인공물보다는 깊이가 있지만, 그 깊이는 다층적 표면들에 의한 깊이라고 할 수 있다. 지질학적 시간을 가지는 산이나 섬처럼 오래된 시간의 느낌을 가진 대상은 연한 색부터 수 십 차례 계속 올린 결과이다. 색은 지형이나 단층 같은 방식으로 진해진다. 그러나 물감이 물리적 두께로 쌓이는 서양화와 달리, 한지에 수묵 채색 된 작품들은 층위가 있으면서 얇다는 특징을 가진다. 덩어리가 아니라면, 그것도 띠처럼 얇은 면의 운동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자연의 생기를 표현한다. 얼마 전 한반도에도 지진대의 활성화가 발견되었던 것처럼, 지구는 살아있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살아있는 지구는 단단한 지표면을 이루는 암석 대에서 발견된다. 산이나 섬을 이루는 암석 대는 인간의 삶에 비하면 너무나 서서히 움직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 같지만, 인간의 피부가 매순간 다른 세포로 교체되듯이 그것들도 변화한다.

동일성 내부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은 영원한 듯 펼쳐진 풍경이 일순간의 고정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모든 것을 과정 속의 존재로 놓는 것은 한갓된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순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를 독단화 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이다. 이윤정의 풍경 속에서 연속과 불연속은 교차한다. 연속과 연속 사이의 불연속적 시공간대, 즉 순차적으로 쌓여있는 지층이 단층이 되고 순서가 뒤바뀌고 하는 격변기 또한 기록된다. 이윤정이 선택한 조형 언어인 끈은 연속성 속에서 변화하는 순간에 대한 감각을 살려준다. 이러한 끈이 풍경에 적용되었을 때, 정중동의 미학은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아스라하게 멀어지는 관념적 풍경이 아니라, 관객의 눈앞에 확 당겨오며, 시각성을 넘어서 촉각성까지 고무하는 풍경이라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먼 것과 가까운 것 사이를 압축시키는 현대성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심오한’ 순수 미술이 언제까지고 ‘바깥의’ 화려한 스펙터클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스펙터클이 근현대미술의 혁명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 역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풍경이 먼저 보이든 끈이 먼저 보이든, 끈이라는 일상적 사물 자체가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건을 묶는 줄부터 메시지가 새겨진 다소간 넓은 띠인 플래카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끈은 우리의 일상에 깔려있다. 끈은 얽히고설킨 망을 이룬다. 일상세계를 넘어 전기나 전자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관계망 자체가 실재가 된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끈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2년이다. 당시에는 인생과 관계에 대한 비유였다. 그 끈들은 풀기도 끊기도 어려운 착종된 선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즘 작품에서 풍경에 적용된 끈은 좀 더 후련하다. 이윤정은 작가노트에서 ‘열심히 끈에 인생과 관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 풍경의 그림에서 끈은 그저 선이고 산수의 준법이었다.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이것이 끈으로 그린 풍경화의 시작이다’라고 밝힌다.

2013년의 산악 여행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서 무엇을 새로이 발견 했다기 보다는 자기 안에 있던 것의 재발견이다. 작가는 ‘히말라야의 단층이 드러난 험준한 산에서 그동안 그려오던 끈들이 겹쳐 보였다’고회고한다. 작가는 2016년에 전시 때문에 방문한 독도에서도 그러한 단층을 발견했다. 어떤 물리 이론(string theory)은 우주를 끈의 진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재)발견은 끈이라는 의미에 집착하기보다는 끈을 그냥 선으로 보고 풍경을 묘사하는 방식을 이끌었다. 동양화는 대개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이물감은 없었다. 시간의 쌓임이 있는 산수를 끈의 얽힘으로 표현한 이 전시는 전통산수화와 민화에 나오는 산을 얽힌 끈을 이용하여 재현한 작품과 산의 골격을 표현한 골격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오려버린 수묵채색화로 이루어져 있다.작가는 산 또는 섬의 능선을 끈으로 따서 대상을 묘사한 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선만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오려진 한 뭉텅이의 선들은 그러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벽면에 그대로, 또는 유리면에, 또는 나무판을 덧대고 설치되어 있다. 지나가면서 본 겨울 산의 능선이나 민화 속 산을 춤추듯이 그린 작품에는 율동감이 있다. 이렇게 끈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인생이라는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야기했지만, 좀 더 분석적이 된 화면은 조형적 의미로의 변화를 예시한다. 이윤정의 작품의 모델이 된 끈은 흰색 레이스이며, 몇 가지 넓이의 끈이 꼬이고 겹쳐지는 방식에 따라 얇은 원근감이 있다. 레이스의 갖가지 무늬의 구멍에서 비롯된 점들은 추상적 원근감을 드러낸다. 조형언어에 의한 원근감은 오려낸 도상을 벽면에 약간 띄워서 설치함으로서 야기된 그림자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산세를 표현한 띠를 오려서 벽이나 유리면에 붙여 생겨난 그림자 역시 선으로 나타난다. 이윤정 전은 ‘산과 섬’이라는 전시부제가 아니었다면, 어떤 작품은 그냥 추상화로 봐도 될 만큼 조형언어가 도드라진다. 조형 언어는 단순히 어떤 내용을 실어 나르는 도구이기 보다는, 늘 보던 같은 대상을 전혀 새롭게 보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 차이를 통해서 재현이라는 맥 빠진 반복을 탈피할 수 있다. 띠는 지시대상과의 결박을 풀어헤치고 차이의 유희를 가능케 한다. [모(模)인왕제색도]에 나타나듯이, 이러한 차이를 통해 대가들의 어법에 또 하나의 어법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힘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지시대상 및 참조물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참조물에는 정선을 비롯한 동양화의 대가들의 방식 또한 포함된다. 그러나 조형언어의 자율성은 작품을 형식화, 장식화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선을 이루는 모든 맥락을 제거한 작품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실재감은 작가가 조형언어를 여전히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양자 간의 균형이다. 안이 밖으로 되고 밖이 안으로 되며, 접혀있다가도 펼쳐질 수 있는 띠는 유연하게 양극을 넘나들 수 있도록 한다. 지시대상과의 관련성을 가지면서도 조형언어의 자기 지시성과의 균형을 찾는 과제는 19세기말 초창기 모더니즘의 특징이었다.

특히 웅장한 산의 실재감과 띠의 힘찬 운동을 근접시킨 작품에서는 근대미술의 어법을 확립한 세잔이 수없이 그렸던 어떤 산을 떠오르게 한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기존 서양회화의 원근법을 거부한 세잔의 방식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세잔은 그림을 얕은 상자처럼 다뤄서 화면 뒤로 공간을 몇 겹으로 표현했다. 세잔의 풍경은 소실점이 없는 대신 공간이 평행하게 몇 겹의 층을 이루며 색채와 색조로 구별된다. 형태는 크기가 줄어드는 대신, 전체 그림을 통해 반복된다. 몇 가지 두께를 가지는 이윤정의 띠의 겹침은 입체감을 주기 위한 원근법이나 모델링의 관행을 벗어나면서도 실재감을 표현한다. 세잔은 물론 마네와 모네 등, 근대미술의 서막을 알린 대표적 화가들은 그림에서 공간적인 깊이감을 피하고 평평하게 보이게 했다. 그들은 그림이란 본질적으로 평평한 표면이라고 생각했으며, 후에는 일정한 질서에 의해 배열된 색들로 덮인 표면이라고 정의되었다.

앨런 보네스는 이러한 접근방식은 모던 아트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여러 겹 올렸지만 물리적으로는 두텁거나 넓지 않은 색 면의 접힘과 펼침은 대상과 그림 모두의 실재성을 확보하려한 근대미술가들의 어법을 공유한다. 세잔이 수없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에서 산이라는 대상과 색깔 있는 붓자국은 공존한다. 인상주의에서는 대상은 사라지고 흐릿한(그러나 충만한) 붓자국만 남았지만, 이는 세잔이 비판했듯이 그림에 있어서 구축의 문제를 간과한 것이다. 대상과 언어를 공존시키고자 하는 양자의 관계에 대한 세잔의 해법은 메를로퐁티를 비롯한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세잔 언어의 특징을 색채에 의한 형 뜨기라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색과 형은 상보적이다. 대상에 대한 환영이면서도 잡혀질 듯 구체적인 화면을 완성한 세잔은 자연과 예술 두 가지를 통일시키고자 했다.

이윤정의 작품에서 선이라는 조형언어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띠는 명암 등 자체 내의 실재감을 가지면서도 대상을 표현한다.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져 조합의 가능성을 열어둔 이 전시의 작품들이 벌이고 있는 대상과 언어 간의 불안한 줄다리기는 근대 미술의 중심 화두였다. 대상과의 관련을 가지는 띠의 흐름은 물리적으로 오려내 지면서 사각형 공간을 벗어났고, 그럼으로서 이러한 줄다리기는 다른 차원으로 확대된다. 전시장 벽면에 드리워지는 또 하나의 선, 즉 그림자는 실물의 일부로 의식된다. 그것은 환영의 환영이면서 환영과 상호작용한다. 그림자 또한 창문이나 거울이라는 비유만큼이나 회화의 기원을 설명해 왔다. 그림자의 비유는 회화의 촉각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빛이 사라지면 질감만 남기 때문이다. 이윤정이 선택한 띠라는 특화된 조형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거기에는 레이스의 질감이 살아있으며, 때로 색감도 남아있다. 작품 속 금색 레이스는 금속성을 띤다.

벽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작품들은 3차원 대상을 2차원으로 드러내는 회화를 벗어나 3차원에 속한다. 줄리언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회화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는 고전적 정의를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평면에서 입체처럼 보이는 것을 본다. 회화는 평평한 대상이다. 하얀 벽에 떨어진 이윤정의 작품/그림자는 3차원으로 확장되긴 했지만, 띠에 남아있던 원근감마저 지워버림으로서 회화가 결국 표면적인 것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그것은 ‘표면에 채색된 표시를 만들어내는 회화 작업의 관행’(줄리언 벨)의 연속이다. 그러나 단순히 회화가 회화임을 확인하는 형식주의는 아니다. 아스라이 명멸하는 선이 아닌 띠는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시각예술의 특징인 생생한 구체성을 담보한다. 이러한 구체성은 단순한 물성을 넘어서 매혹적인 자연의 일부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