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ement
작가노트
레이스 드로잉- 백색산수
레이스 드로잉- 백색산수
나의 그림은 산수화로부터 시작이 된다.
그러나 모필에 의한 필선으로 그려지는 여느 산수화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나는 산수화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산수의 준법, 여백, 구름, 물결…
이것들을 탁본, 재봉, 꼴라주 등의 방법으로 재해석한다.
산수의 여백을 모두 도려낸다든지 산수를 묘사하는 준법을 레이스끈으로 재봉을 해서 표현한다든지 꼴라주로 붙인 구름들이 전통 동양화와는 또 다른 시각적 경험을 하게 한다.
그 중 이번 전시의 주된 표현 방식은 레이스끈으로 재봉한 작품들이다.
왜 레이스인가?
레이스는 여성적이고 부드러우며 섬세하고 유연한 재료이다.
굵기, 두께, 짜임의 문양이 아주 다양하고 장식적이다.
내가 묘사하고 있는 바위산은 매우 힘차고 남성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 일견 그것을 묘사하는 재료로서 레이스는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누군가 물었다. 왜 레이스인가요? 꽤 근본적인 질문인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끈이 얽혀있는 형태의 추상작품을 하던 시기와 연결이 되겠지만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명확하게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나는 반전(反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주 여성적이고 섬세한 재료로 남성적이고 힘찬 바위산을 표현하고 수묵산수화의 먹색 대신 백색의 산수화를 그린다. 여리고 소극적인 듯 보이는 어떤 이에게 발견되는 내면의 단단함. 이러한 반전을 보여주고 싶어서 레이스라는 재료를 골랐던 것 같다.
색이 입혀진 한지나 흰 벽에 레이스 끈으로 산을 드로잉한다.
굵고 가는 레이스 선들이 얽히고 꼬이고 겹치면서 산의 주름을 묘사해 나간다. 두께와 독특한 질감으로 평면과 부조 사이를 넘나든다. 레이스를 재봉하는 색실도 그 위에서 상하좌우를 누비며 나름의 드로잉을 펼쳐나간다. 고르지 않고 너덜거리며 늘어지고 엉켜버린 실도 자유로운 선의 역할을 한다.
거기에 그림자까지 가세하면 드로잉의 선이 더 선명해지고 입체감이 생긴다.
이 레이스 드로잉이 수묵산수화와 연결지어지는가?
동시대 미술에서 장르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지만 나는 이 작품들을 산수화라고 말한다, 백색산수.
재료는 레이스 끈과 실이지만 나는 산수의 주름(皴)을 따라가며 산을 읽었고 그것을 표현했다. 선의 강약과 농담과 번짐까지도 염두에 두면서 레이스 끈을 재봉하였다.
이 작품들은 동양화와 동떨어진 재료를 쓰고 있지만 동양화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윤정
스무고개
스무고개
어린 시절 친구들과 스무고개 놀이를 하던 기억이 있다.
스무고개 놀이는 한 사람이 어떤 단어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상대방이 스무 번까지 질문을 하여 그것을 알아맞히는 수수께끼 놀이이다.
질문에 따라 첫 번째 질문에서 간단히 답을 맞출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지막 질문에서도 답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질문자와 답을 맞추는 자 모두가 내가 되는 일인이역의 스무고개 게임을 시작한다.
나는 산길을 간다.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또 하나의 고개.
고개고개마다 만나는 풍경은 같은 듯 모두 다르고 같은 고개에서 만나는 모습도 시간마다 다르다.
고개를 넘으며 이 너머에 내가 찾는 그곳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답을 찾으려 여기저기를 헤메본다.
바닷가도 거닐어보고 산길도 다녀본다.
처음에는 내가 풀어내야 할 답만을 생각하고 걸었으나 점차로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떠가는 구름, 부딪치는 파도, 날아가는 새, 뒹구는 바위….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내 맘에 생긴 여유 때문일까?
만약 종국에 내가 이 스무고개의 답을 맞추지 못한다면 그 여정 속에 보았던 그 풍경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이번에도 열다섯 번째 고개를 넘는다.
-작가노트-
이번 전시의 제목 스무고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말 그대로 ’스무 개의 고개‘ 즉 산수 그림이기도 하고 단어 맞추기 게임인 ’스무고개‘를 의미하기도 한다.
산과 바위는 레이스 끈을 한지에 찍어 묘사하거나 실제 레이스 끈을 재봉하던 이전 작품들과의 연결선에 있다.
한지에 겹쳐 찍힌 레이스 끈의 흔적과 재봉된 레이스 끈은 평면 위에 쌓여 두께를 형성하며 부조의 형태에 가까워진다. 그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모양은 그것이 묘사하려는 바위와 산의 형태를 그리지만 특유의 문양과 질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은 처음에 생각하지 못한 우연한 수확이다.
채석강의 주름 잡힌 바위들과 해초로 덮여 한층 부드러워 보이는 제주 함덕의 바위들을 그려보았다. 그러면서 그 주변에서 발견되는 작은 것들로도 눈을 돌려본다. 내 작업의 큰 틀에서 빗겨나가지만 뜻밖에 옆에서 발견되는 즐거운 풍경들도 살짝 끼워 넣어 가볍게 그려 보았다.
<작가노트>
나는 한지 위에 먹물 묻힌 레이스 끈을 찍어 그 흔적을 겹쳐서 바위와 산을 그린다.
한지 위에 찍힌 레이스 끈의 흔적은 일종의 동양화 준법인 셈이다.
흔적은 흐느적거리며 쌓이고 쌓이며 단단해져서 바위가 된다.
그 위에 채색과 레이스 끈의 꼬임과 접힘을 강조하는 점들을 무수히 겹쳐 칠하고 찍으면서 바위와 산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작가노트>
채석강
채석강
나는 한지 위에 먹물 묻힌 레이스 끈을 찍어 그 흔적을 겹쳐서 바위와 산을 그린다.
한지 위에 찍힌 레이스 끈의 흔적은 일종의 동양화 준법인 셈이다.
흔적은 흐느적거리며 쌓이고 쌓이며 단단해져서 바위가 된다.
그 위에 채색과 레이스 끈의 꼬임과 접힘을 강조하는 점들을 무수히 겹쳐 칠하고 찍으면서 바위와 산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여기서 나는 특히 바위의 층들에 주목한다.
수 만년에 걸쳐 각기 다른 자연 조건과 환경에 의해서 퇴적되고 압축되고 깎인 모양, 이것이 바위와 지형의 독특한 특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한 층은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온갖 새들과 동물들의 분비물로 만들어졌고 그 아래 층은 깊고 깊은 심해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으며 해초와 물고기들의 흔적이 들어있으며, 또 그 아래 층은…..
우리는 그 모든 세월의 흔적을 바위의 층에서 본다.
그 층들이 모여서 독특한 바위의 형상을 만든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각 층마다 새겨진 환희와 슬픔과 절망과 희망, 두려움….
그것이 모인 것이 각자의 독특한 특성이 된 것은 아닐까?
바위의 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바위의 층을 찾아서 전남 부안에 있는 채석강을 찾았다.
수 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다는 독특한 퇴적암 지형이다.
그야말로 땅의 주름으로 가득한 곳.
주름진 절벽과 떨어져 나온 바위들, 거기에 붙어 있는 따개비 같은 작은 생명들이 꼬물거린다.
시루떡 같이 주름진 바위 사이를 거닐면서 이 주름을 만들어낸 세월과 그것을 스쳐지나간 존재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화폭에 그렸다.
그림에 그려진 땅의 주름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그것을 그린 작가의 마음 속 희노애락과 특유한 성정을 알아차려 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냥 모르고 지나쳐갔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한다.
나는 그 주름 속에 무언가를 그리긴 했던 것 같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 중 새로운 작업은 레이스 끈을 재봉해 만든 바위를 흰 벽 위에 띄운 비정형의 작품이다. 벽 위에 레이스 끈으로 만든 바위가 걸린 셈이다.
여기에 재봉된 레이스끈은 한지 위에 찍어 준법처럼 사용하던 끈의 실체이다. 한지에 끈을 찍어 표현한 바위에서 여백을 덜어내고, 색을 덜어내고. 묘사를 덜어내고 종국에는 실제의 레이스 끈과 그림자만 남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유연하고 부드러운 재료로 단단한 바위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든 바위의 느낌은 부드러움일까 단단함일까?
이윤정 작가노트
장생
장생
이번 전시에는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을 그렸다.
바위
바위는 언제 생성되었는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시련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것 밖에는. 끊임없이 들이치는 파도와 바람에 시달려 깎이고 주름지며 지금의 자리에 지금의 형태 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위를 십장생의 하나로 꼽으며 장수의 상징으로 이야기 한다.
주름
나는 바위를 그릴 때 동양화의 준법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그린다. 준(皴)은 주름을 따라 대상의 형태를 선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주름에는 그 존재의 살아온 세월, 희노애락이 새겨져 있다. 젊음에는 주름이 없다. 사람도 그렇다.
끈
바위를 준법을 이용하여 묘사를 하되 모필을 사용한 전통적인 필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한지에 레이스 끈을 찍은 흔적을 마치 준법처럼 사용하여 바위를 그린다. 찍어낸 흔적(선)만 남기고 여백을 모두 잘라내기도 한다. 또는 직접 한지에 직접 레이스 끈을 박음질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저 끈이 얽힌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진 끈은 장수를 상징하는 물건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돌잡이를 할 때도 아기가 실타래를 잡으면 장수할 것이라며 기뻐한다.
나는 레이스 끈을 이용한 나만의 준법으로 바위를 그렸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나의 그림은 대상과 표현 방법 모두가 ‘장생’을 그린 것이 아닌가.
그와 더불어 그 긴 삶 속에서 그 곁을 순산순간 스쳐지나갔던 존재들도 생각해본다. 그들은 장생의 기간 동안 그 존재에 어떤 흔적과 영향을 끼쳤을까?
이윤정 작가노트
땅의 주름
땅의 주름
끈으로 산을 그린다.
바위를 그린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산수를 그릴 때 준(皴)이라는 선으로 대상을 묘사한다. 이때의 준(皴)은 한자로 주름준 즉 바위와 산의 주름을 따라서 선으로 그려내는 것인데 준법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대상의 형태는 물론이고 입체감, 양감, 음영까지도 표현한다. 산수의 특징에 따라 준법은 다양하게 발달하였고 전통 산수에서는 그리는 산과 바위의 형태에 따라 그것에 적합한 준법을 사용하여 산수를 묘사해왔다.
나는 끈을 그린다.
끈 그림을 그린 지는 십여 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한참은 끈은 은유였고 상징이었다. 끈의 얽힘과 꼬임이 인생의 굴곡이나 존재들 간의 관계를 나타냈다. 점차로 끈의 형태가 변화하고 의미가 변화하여 지금은 그저 끈은 끈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산수를 표현하는 준의 역할을 하는 끈이다. 대상 표현의 도구로서의 끈이다.
레이스 끈에 먹물을 흠뻑 적셔 한지에 찍어내어 그 흔적을 나만의 준으로 여기며 산과 바위의 주름을 따라 간다. 구겨지고 꼬인 끈이 한지에 찍힌다. 그 흔적들이 겹쳐지면서 산과 바위의 형태를 만들고 덩어리를 만들면서 전통적인 산수와는 또 다른 산수화를 만들어 나간다. 끈으로 땅의 주름을 읽고 땅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이 위에 서로 다른 색을 여러 차례 겹쳐 입히고 끈의 꼬임을 강조하는 점을 찍는 과정을 지나면 서서히 끈으로 그린 산수의 모습이 드러난다.
산수의 모습이 완성되어 갈 즈음 그림에 칼을 댈 때가 있다. 준의 역할을 하며 산의 형태를 표현한 끈만 남기고 나머지 여백을 아낌없이 잘라낸다. 그러면 끈만 남은 부정형 형태의 작품이 남는다.
‘한지에 수묵 채색’
어떤 이는 그 부정형의 작품을 보고 수묵채색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수묵채색화여도 좋고 수묵채색화가 아니라도 좋다. 동양화의 번짐과 여운이 없고 디자인 도안 같다고 하는 이도 있다. 동양화여도 좋고 동양화가 아니어도 좋다. 그것은 산수로 보일 때도 있고 끈이 얽혀 있는 추상적 형태로 보일 때도 있다. 산수여도 좋고 추상이어도 좋다. 뭐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다.
그것을 벽에 약간의 공간을 띄워 건다.
여기에 빛을 쏘아주면 그림 아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또 하나의 끈의 얽힘이 나타난다. 흰 벽에 여백이 잘린 산과 바위의 부정형 덩어리가 걸린다. 그러면 그 흰 벽은 작품이 걸리는 배경이 아닌 끝없는 하늘이 되고 망망한 바다가 된다.
여백이 벽 위로 끝도 없이 확장된다.
주름은 세월을 보여준다.
그것이 지나온 수 만년의 시간동안 비바람을 맞고 온갖 시련을 견뎌낸 결과이다. 산도 바위도 비바람에 깎여 지금의 형태로 살아남았다. 그 주름을 따라 그리는 그림은 그 대상의 살아온 역사를 그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주름도 다르지 않다. 사는 동안의 희로애락이 그 주름에 담겨있다.
그렇다면 끈으로 땅의 주름을 그리고 있는 지금 그리는 대상이 달라지고 형태가 달라졌지만 다시 십 수 년 전 끈 그림을 시작할 때에 표현하려 했던 것들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2018.10월
With strings, I draw mountains.
I draw rocks. In traditional Oriental painting, when painting a shanshui(a form of natural landscapes which include mountains and rivers or waterfalls), the object is represented with lines called “jun”. Jun is a way of drawing, with a line, along the folds of rocks and mountains, i.e., folding jun in Chinese, and this jun method is not simply a line but it describes not only the forms of objects but their depth, volume, shades.
Depending on the characteristics of shanshui, the jun method had developed in various ways and in traditional shanshui, depending on the forms of mountains and rocks that were being drawn, shanshui had been portrayed using the jun method that was appropriate to them.
I draw strings
I believe I had been making string drawings for well over a decade, For a long while, string was a metaphor and a symbol. Its entaglement and twists showed the ups and downs of life or the relationship among beings. Gradually, the string’s form changed and it’s meaning changed; now, a string is just a string. To be more precise, it is a string that plays the role of jun depicting the shanshui. It is a string as a tool of expression of objects.
I soak lace strings with Chinese ink, imprint it on hanji paper(traditional Korean paper), and considering the trace to be my very own jun, I follow along the folds of the mountains and rocks. The crumpled and twined strings are stamped on the hanji. As these traces overlap, it creates forms of mountains and rocks, and as it builds a mass, it creates a shanshui that is different from the traditional ones. With strings, I read the folds of land and draw the land. This is the first process of which I start to make paintings.
As I go through the process of putting on different colors, overlapping them numerous times, and mark dots which emphasize the twists of the string, an image of shanshui, drawn with strings, slowly, comes into view.
When the image of shanshui is about to be completed, I, at times, take a knife and go at the painting.
I leave the strings depicting the form of mountains, playing its role as jun, and I generously cut out the remaining margin.
Then remains a piece of irregular form where it is left with strings, only.
“Korean color and ink painting on hanji”
Some people say, when looking at a work of irregular form, that it is not a Korean color and ink painting. It may be a Korean color and ink painting, and it may not be a Korean color and ink painting. There are those who say that there are no ink-spreadings or a sense of emotional resonance found in Oriental paintings, and that it looks like a design drawing. It may be an Oriental painting and it may not to be an Oriental painting.
There are times when it looks like a shanshui, and there are times when it looks like an abstract form where cords are intertwined. It may be a shanshui and it may be an abstract. It doesn’t need to be named into something.
It is hung with a little space off from the wall.When light is shun on it, shadow casts underneath the painting, revealing another intertwinement of the strings.
On the white wall hangs a mass of irregular form of mountains and rocks of which the margin has been cut off.
Then, the white wall becomes an endless sky and boundless ocean, not the background where the work is hung.The margin, without limit, extends across the wall.
The folds show time.
They are the result of enduring all sorts of ordeal, baring the winds and rains for tens of thousands of years passed. Even mountains and even rocks had been shaved by the winds and rains and survived in the form they are now. To draw along the folds is an act of drawing the history which the object had lived through. It is no different with the folds(wrinkles) of humans. All the joy, anger, fear and pleasures of life are embodied in the folds.
Then, I think, that although, now, the object of drawing have changed, as with the forms drawing the folds of land with strings may be my return to what I had tried to express when starting the string drawings, dozens of years ago, again.
Yoonjeong Lee
산과 섬
작가노트
히말라야에 갔다.
단층이 드러난 험준한 산을 보면서 15시간 지프를 타고 달렸다.
그 산의 단층에 내가 그려오던 끈들이 겹쳐보였다.
돌아와서 끈을 이용한 몇 점의 풍경 그림을 그렸다.
열심히 끈에 인생과 관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던 것을 내려놓았다
그 풍경 그림에서의 끈은 그저 선이고 산수의 준법이었다.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2014 개인전 작가노트
작가노트
보이는 끈으로 그리는 보이지 않은 끈 그림.
이것은 수 년 동안 그려왔던 내 그림의 주제였다.
끈은 일반적으로 물건을 매거나 잇는 가늘고 긴 물건을 얘기한다.
끈에서 나는 인간의 삶을 보았다.
살면서 굽이치고 꼬이고 다양한 굴곡을 그리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끈과 같은 인생.
이것은 또한 여러 가닥이 만나고 얽히면서 살아가는 인간관계와 유사하다고 느껴졌고 그러한 끈의 꼬임은 나의 그림이 되었다.
끈은 갈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강박적이 되어갔다.
그 그림들은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리는 내게도 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의 불안한 내면과의 연관성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 작품들은 나의 진솔한 이야기였고 외침이었다.
그렇게 강박적으로 얽혀서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끈이 풀렸다.
자유로움, 내려놓기, 장난스러움, 즐거움, 유희…
자유로워진 끈은 무엇이든 만든다. 꽃이 되고 산이 되고 여인이 된다.
이제 끈의 유희가 시작되었다.
(2014년 개인전 작가노트)
꿈을 꾸었다
작가노트
꿈을 꾸었다.
높은 둥지 위의 커다란 새.
둥지 안에는 여러 개의 알이 있었다.
그 큰 새는 부리로 자기가 낳는 알을 쪼아 깨뜨리고 있었다.
마치 그 알에서 깨어날 새끼가 어미 새의 자유를 구속하게 될 것을 아는 것처럼.
그 새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생활의 고달픔과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알고 싶은 나의 마음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깨어지지 않은 몇 개의 알들을 추려서 그 커다란 새의 품에 넣어 주고는 돌아 내려왔다.
(1999년 개인전 작가노트)